시간의 영창자.[The Ark of Pararell World][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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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상당히 지나 어느덧 저녁을 먹어야 할 타임이 되었다고 시계가 땡땡거린다.
고풍스럽게 걸려 있는 괘종시계도 그렇지만 내 배가 신호는 더 빠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시간에 딱 맟춰, 담탱이와 지혁이, 바람이가 동시에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뭐, 두 사람이 들어오는 건 나랑 관계가 없는데, 단 한 사람의 경우에는 좀 심각해진다.
누구인지는 말 안해도 잘 알거라고 생각하지만.

"얌전히 잘 있었나?"

"네. 저도 방금 일어났습니다."

그럼요, 당연히 아주 얌전하게 잘 있었습지요.
누구 분부인데요. 훌쩍.
또 총들고 지랄 발광했다가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는 걸 보고싶지는 않거든요.

"전부터 말했던 거지만......항상 네놈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알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머릿속에 그정도로 박혀있다면 그걸로 됐다. 그럼 식사를 하러 가도록 하자."

담팅이의 말에, 바람이와 지혁이는 입고 있던 복장 그대로(복장이래봐야 사관학교 교복이지만.) 조용히 출구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대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머리통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해진다.

-쾅!-

"어걱?"

또다시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입에 내지르며 휘청거리는 나.
다행히 이번엔 아까보다는 충격량이 덜해서 기절은 안했.....이게 문제가 아니지.
아니, 이번엔 왜 때린 거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에!
약간 열받은 상태로 담탱이를 쳐다보자, 그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씨댕아. 지금 니 복장이 무슨 거지깽깽이도 아니고 날라리 펑크 스타일도 아니고 어디서 허접한 걸 입고 돌아다니려고 그러냐? 빨리 교복 안 처입어?"

씨발, 결국 복장이었냐.......
좀 편하게 살면 어때서? 이래봬도 상당히 활동성이 좋은 옷이라구.
왜 하필이면 옷 갈아입은 지 얼마 안돼서(그것도 강제로 갈아입혀놨다) 또 교복으로 다시 환장(?)하라고 개태클이란 말이냐......애초에 이럴거면 갈아입히지나 말지.
두고보자. 이 은혜(?)는 나중에 두배, 아니 세 배로 되돌려서 갚아주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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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한산한 풍경치고는 꽤나 고풍적인 모습의 식당 풍경이 내 눈에 들어온다.
과연, 역시 갑부나 정치권 세력의 엘리트나 부르주아들이 다니는 학교답게 최강의 시설과 인테리어를 자랑하는군.
그것에 비하면, 우리 학교 인테리어는 정말로 무슨 애들 장난한것처럼 느껴지는구만.........
식사를 해야하니 식판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렸지만 그런 건 눈에 씻고 찾아봐도 안 보였다.
대신에, 고급스럽게 보이는 접시들이 왕창 쌓여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가만히 지켜보니 그 접시를 들고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담아 적정량만 가져와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나와 바람이, 지혁이도 가서 접시를 들어 음식이 있는 데로 걸어가려는 찰나, 아까 귓구녕에 꼽아 두었던 자동 번역기의 리시버에서 내 성질을 긁는 소리가 하나 둘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호오, 저녀석, 아까 그 미친놈이잖아?"

"아, 아스가르드의 왕녀님들에게 총질한 그 싸이코?"

"생긴건 여자같이 생긴게 복장은 남자옷을입고있네, 쿡쿡쿡..."

"어디서 저런 거지같은 것을이 이런 명문학교에 오셨나..."

"복장 봐, 짜증나게 군인스타일이야. 더러워. 로바에 왔으면 로마법에 따르라는 말도 모르나? 어글리 코리안."

이쯤 되면 나도 슬슬 뚜껑이 열리기 시작한다.
고로, 접시를 든 상태에서 한쪽 손을 내려  내 바지 좌우 허벅지에 장착되어 있는 P-01 램제트 피스톨을 꺼낼 준비를 하자, 담탱이가 조용히 한 마디 한다. 그것도 상당히 위압적인 목소리로.

"김강철 준위. 거기서 스톱."

"........"

"열받는건 알지만. 넌 자제력이 없어도 너무 없다. 참는 것도 좀 배워봐."

"..선생님. 지금 저것들이 나를 욕하는 거면 참겠습니다만, 우리들 전체를 헐뜯고 있다니까요?"

"그렇다고 니 꼴린대로 무차별 사격을 할 거냐? 사람 다 죽으라고?"

"............."

"하여간 넌 그냥 찌그러져 있어라. 나도 듣는건 좀 짜증나니 대강 위협정도는 해놓을 필요는 있겠군."

말을 마친 담팅이는 곧바로 앞의 지혁이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소근거렸고, 지혁이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면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누구 하나 둘 정도는 고사를 치를 듯하다. 왜냐하면 녀석의 얼굴에서 살기가 감지되었기 떄문인데. 녀석의 희미하게 웃는 얼굴에 묘하게 번지는 살기란 참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경험상 십중팔구 저 미소가 나왔다는건 조만간 여기는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가게 될 거라는 의미와도 일치한다. 거기에, 대강 흘낏 쳐다보니 이미 지혁이의 손은 자신의 허벅지에 붙어 있는 다용도 수납 주머니 쪽으로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안 좋았는지, 지혁이가 수납 주머니 단추를 끄르려는 찰나, 출입구에 예의 그 세 아르카디안 왕녀가 출현했다. 당연히 반응은 급속도로 돌변하게 마련이다. 우리를 조용히 귓속말로 갈구던 애들이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깍듯이 숙였으니까. 

"좋은 저녁 되시기를."

"이쪽에서 같이 식사하지 않으시겠어요? 마침 전망도 참 좋답니다."

리시버에서 아양을 떠는 몇 안 돼는 남자애들의 목소리와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같이 울려퍼진다.
언제나 느끼느 거지만, 이런 식의 행동패턴을 가지고 있는 애들은 겉과 속이 틀린 경우가 상당히 많다.
즉, 겉으로는 갖은 아양을 다 떨면서 남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전형적인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인간의 종류랄까? 이래서 속담 중에는 틀린 말이 거의 없다는 말을 믿게 된다.
애들이 고개 숙이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까 리시버에서 담탱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절대 고개 숙이지 마라. 우리는 공화국 시민이자 군인이다. 타 국가의 왕족에게 예를 갗출 필요 따위는 없다." 

그 무슨 야밤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당연한 말이다. 우리는 공화국 시민이다. 덧붙여, 군인직도 겸하고 있다. 우리가 충성(?)을 바쳐야 할 상대는 국가와 극민의 대표로 뽑혀진 국가원수인 대통령이지 이런 왕족들에게까지 충성의 예를 갗출 필요까지는 없다.
고로, 남들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든 말든, 나를 포함한 일행은 다시 접시를 들어 먹을 음식을 대강 퍼담아 테이블로 향하려고 했다.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이 왕녀 일행이 다른 애들의 말은 다 씹고 우리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추측컨대 아까의 사건에 대해서 사과하라고 고함을 쫑알쫑알 칠 생각 같은데, 이상하게도 표정에서는 그런 기척을 읽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눈물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울고 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됬지만. 왜 울었는지 내가 알 게 뭐야. 어차피 남남인데.

".........무슨 용무지?"

다가오는 왕녀들을 제제하며 담탱이가 먼저 선공을 건다.
이럴 때는 상당히 담탱이가 든든한 방패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경우는 매우 가끔 벌어지는 일이라 큰 효과는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담탱이는 나를 사람 만든다고 두들겨패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오랜만이네요. 박기순 아저씨. 한국에서 어렸을때 본 뒤로 정확히 10년만에 뵙네요. 이제는 대령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담탱이의 말에 왕녀들 중 한 사람이 나와서 간단히 예를 표한 후에 대답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애들 표정은 뭐 씹은 것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군. 벌써 10년이나 흘렀나. 그때에 비하면 아름답게 성장했구나. 아이리스."

"칭찬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한 나라의 왕족인 너희들이 우리 같은 민간인들에게 볼 일은 없을 터. 사실상 남남이라고 해도 좋을 처지다. 무슨 일로 우리 앞에 나타났는지?"

"남남은 아닙니다, 아저씨. 아저씨께서는 저희들의 시아버님과 죽마고우 이시잖습니까."

이게 뭔말이래?
울 담탱이가 계급이 대령인 건 뭐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학교로 오시면서 계급권한 일시정지로 인해 그런건 별 의미가 없는걸로 아는데. 그건 뒤집어놓고,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래.........
시아버님은 또 뭐여? 저 나이에 시집이라도 갔다는 이야기인가?
상황을 보아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녀석이 나말고 뒤에도 있는거 같다.

"....나이에 안맞게 벌써 결혼이라. 부러워 디지겠군, 저렇게 고운 신부는 세상에 다시 없을 거다."

"....누군지 몰라도 재미 좀 봤겠다. 안그러냐 강철아. 새삼 저거 보고있으니 염장이 얼마나 짜증나는지 알거같아."

바로 이것들. 웬수라면 웬수고 친구라면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지혁이와 바람이다.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싶다. 누군지 몰라도 저렇게 예쁜 여자애를 마누라로 삼다니 복에 겨워 디질 놈이 아니겠는가마는. 그렇다는건 신랑도 분명히 이곳에 있을 터. 왜 안 나타나? 뭐 내가 알바는 아닌가?

"그렇기는 한데, 우리랑은 관계 없잖냐. 게다가, 저 애들 이미 임자 있는 몸이셔. 신경들 끄라우."

"우우..........."

"하지만 너무 아깝다...데이트 기회도 한번 못 가지고......"

풋.
주제를 알고 까부시구랴.
저 애들은 그 이름도 높고 높은 왕족이다 이 말씀.
그런 애들이 우리같은 평범한, 그것도 초 거지같은(?) 애들과 데이트라?
해주는건 둘째치고 했다간 돈이 어마어마하게 깨질거다. 그것도 몇천만 단위로.
아무리 얼굴이 이뻐도 데이트비용이 그렇게 깨진다면 난 사양이다.
사람은 실용성 있게 살아야하거든. 큭큭큭큭.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담팅이와 그녀들과의 대화는 계속해서 내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과거의 일이다. 그건 그렇고, 그녀석은 잘 지내나? 10년전 아들내미를 그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린 뒤로 폐인이되지않을까 해서 내심 걱정했다만."

"..............."

"정곡을 찔렀나. 미안하게 되었군."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보고싶은 것도 있습니다. 함께 식사하시겠는지요?"

"미안하지만 거절한다. 데리고 온 애들 밥 감독도 해야하거든."

역시. 얼굴에 철판 용접했다는 소문은 확실하구만.
제2고교 전설의 구타머신이자 최악의 교관으로 악평이 나 있으며 남녀 가리지않고 접근거부순위1위를 달리는 사람답게 식사 합석제의도 커트해버리는군. 멋지십니다 선생님. 역시 우리의 기대를 한번도 저버리지 않으시는군요. 씨발.
저렇게 이쁜 애들이 합석제의 좀 하면 거절하지 말고 받으란말이야아아아아!!!!!!!!!!!

"죄송하지만 저희들도 꼭 합석해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이 용무가 있는건 아저씨도 포함되지만 저기 있는 김강철이라는 분에게도 용무가 있거든요."

그 말에, 담팅이가 무서운 눈을 하면서 나를 확 쳐다보았고, 그것을 본 나는 있는 힘껏 "나는 죄 없어요!"작전을 실행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 이번일과는 아무상관 없어요! 라는 취지인데, 여하간 안 맞고 안 다굴당하기 위한 나 나름대로 살기위한 모종의 발악이라고 생각해두면 매우 이해가 빠를거라고 생각한다.

"난 용무 없어. 게다가, 너네한테 총 쏜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용무가 있다는 거야?"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에요. 일단 앉으실까요? 이야기가 길어질것 같으니."

그렇게 말하며 담팅이가 아이리스라고 부르는 왕녀는 가운데에 있는 매우 화려한 식탁을 손으로 가리켰고, 담팅이는 약간 띠껍다는 표정을 지으며 식탁으로 갈어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는건 나도, 지혁이도, 바람이도 거기 가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뜻과도 같다. 멋대로 '나 딴데서 먹을래요' 이랬다가는 분명히 맞아죽을 분위기이기도 하다. 뭐 그전에......

"...........헤에....."

나를 빼고 두 녀석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게 저 애들과 같이 밥먹는게 좋기는 한가보다.
배신자들. 나는 기분이 좀 켕긴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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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 달그락........."

"쩔그럭..쩔컹....."

좌우에서 가지가지로 칼질과 나이프질 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히 음식을 먹으려면 손질해야하는건 기본이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좀 내 귀에 성가시게 들린다.
가시방석에 앉아서 식사하는 느낌이라서 그런 걸까나. 마치 웬수랑 밥 먹는듯한 그런 기분 말이다.
그런 내 기분과는 관계없이 담팅이와 그 똘마니 둘은 열심히 먹는것에 온 사념을 집중하는 것 같지만.
은근히 저런 거 보면 약이 오른다. 자고로, 남 잘되는 꼴 못 본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나한테 볼 일이 있다는 게 뭐야?"

이런 말도 안 돼게 짜증나는 분위기를 깨볼 겸 해서, 이쪽이 먼저 핀트를 꽂기로 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순간적으로 그녀들의 포크질과 나이프질이 멈칫 하는것을 볼 수 있었다.
필시, 나한테 뭐 안 좋은 감정이 있으니 볼 일이란 게 성립이 되겠지만은.
그건 뭐 대강 한 귀로 듣고 넘기고, 저것들에게 빌려준 내 목걸이나 찾아가야겠다.
역시 그게 없으니까 뭔가 허전해. 이상하게 평소에는 휙휙 던져두던 물건이 이렇게 궁할 때에는 필요해진단 말이야.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세 왕녀 다 약속이나 한듯 포크와 나이프를 동시에 내려놓고는 빤히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그중에 눈동자 색이 진보라색인, 매우 이지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긴 생머리의 왕녀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이 건네준 목걸이에 대한 것입니다."

"......그건 왜? 그냥 평범한 목걸이일 뿐이잖아.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나서기 전에. 네 이름부터 밝혀야 하는게 순서 아닌가? 그리고 내 이름은 당신이 아니라 김 강철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군요. 예전엔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전 '너'라는 것이 아니라 트리스티아라고 하는 좋은 이름이 있습니다."

"....피장파장이군. 그건 던져두고, 무슨 헛소리를 하니? 난 머리털에 털 나고서부터도 널 본적이 없는데 예전이란 말이 왜 나오는지 궁금하군."

".........그건 무슨 의미죠?"

내 말에, 트리스티아라는 왕녀가 약간 당혹감을 드러내며 내게 반문해온다.
당연한 이야기일런지도 모르지만, 전에도 언급했듯 나는 과거의 기억이라고는 10살 때까지의 기억 뿐이다.
그 이전의 기억들은 기억해내려고 해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게 좀 걸리긴 했지만, 과거에 대해 알 생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말 그대로다. 나는 너 같은거 본적도 없어.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정신이 돌아온 10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널 본 기억은 없다."

".........사고?"

".......기억하고싶지도 않지만, 내 부모님은 내가 7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내가 알고있는 건 그것뿐이야."

"사고.......라."

내 답변에, 트리스티아는 눈을 지긋이 감고 한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해봐야 뭐가 나오겠느냐마는, 뭐 저 아이가 입을 가만히 다물어주면 나야 편하긴 하다.
솔직히 말해 저런 생면부지의 아이와 과거의 안 좋은 일에 대해서 논하고 싶디고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트리스티아가 곧바로 눈을 뜨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난 누가 이유없이 멋대로 쳐다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다시 한 마디 지적을 해주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 그녀의 눈이 갑자기 진보라색에서 연보라색으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키이이잉!-

갑자기 귀를 자극하는 파공성이 스쳐지나갔고, 곧이어 트리스티아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오른손을 조용히 치켜들어 허공에 무언가를 그린 뒤 다시 내게로 그 손가락을 향하며 이상한 말을 읇조리기 시작했다.

"슬립.(Sleep)"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순식간에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사력을 다해 식탁 모서리를 잡고 버텨 보지만 역부족임을 느낀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간신히 고개를 들고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고, 거의 참기 힘든 목소리로 악을 쓰려 했다.

"이..........이게 무슨 짓이야!!!!"

"상당히 강한 정신력을 가지셨군요. 하지만, 지금은 잠시 이대로 잠들어 주시기 바래요."

그 말과 함꼐, 트리스티아는 나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을 접어 가볍게 한번 튀겼고, 그 소리가 남과 동시에 급속도로 의식이 멀어저 버렸다. 간단히 말해서, 그냥 잠들어 버렸다가 나은 표현일 것 같다.
거부할 수 없는 꿈나라로 떨어지면서 한가지는 확실히 되씹기로 했다.
나중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그 트리스티아인지 뭔지 하는 여자애의 이마에다가 바람 구멍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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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이 의식을 잃고 그대로 식탁에 머리를 박아버리자, 트리스티아는 그를 가리키던 손가락을 풀어 자신의 입술에 갖다댄 뒤, 잠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낮으면서도 상당히 기분이 묘해지는 듯한 소리로 긴, 그리고 슬픈 색조의 시편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대, 차원의 회랑에서 일족을 수호하는 자여.-

-나는 모든 조율자의 중심에 있는 자. 위대한 의지를 반영하는 자.-

-위대한 프라이오스의 피를 계승하는 자이니라.-

-나 이제 과거의 그 찬란한 모습을 이곳에서 나타낼지어니,-

-그대의 힘을 빌려 이곳에서 내가 다시 현신(現身)하리라.-

그 말이 끝나자 그녀의 주위로 엄청난 기세의 바람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식당 안은 그릇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테이블 보가 하늘을 나는 양탄자처럼 펄럭거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당연한 결과지만 학생들은 겁에 질린 채 식당을 성급히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그 진원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혁이와 바람이도 겁에 질린 건 예외가 아니었다.

"무무무......무슨 일이래니? 이이이이게?"

"아무래도.....강철이 뭔가 단단히 실수해서 열받아 그런 거 아니냐?"

"미친!!! 난 아직 죽고싶지 않아!!!!"

상황이 이렇지만 유일하게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담임과 나머지 두 왕녀, 그리고 시녀들이었다. 시녀들이야 같은 아르카디안이라 그럴 법도 하겠지만 담임은 그냥 평범한 인간일 텐데도 그 자세가 매우 초지일관하게 태연했다. 마치, 해탈한 승려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약 1분의 시간이 지나자, 미친 듯이 불어치던 바람이 걷히고 트리스티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예의 그 이지적인 표정은 여전했지만,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이 보였다.
양쪽 얼굴과 이마에 드러나 있는 3개의 붉은 진홍빛 사이오닉 코어, 그리고 등 뒤로 나 있는 세 쌍의 사이오닉 에너지 덩어리의 묵빛 날개와 날개 중앙에 박혀 있는 에너지 코어.
그 모습은 마치, 전설로만 내려오던 흑천사와 흡사했다.

"....결국, 본신을 드러냈군, 그래서 뭘 어쩔 생각이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담임이 조용히 한 마디를 던졌다.
그 말에, 트리스티아 역시 짧게 응수를 던진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카모플라쥬[Camoplague:위장]를 벗길 겁니다."

"웃기는군. 그 애가 진짜로 너희들의 죽은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네. 처음엔 믿고싶지 않았지만, 이 목걸이를 보고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트리스티아는 말을 마치며 강철이 항상 걸고 다니던 은색 십자가 목걸이를 들어 보였고, 그것을 본 담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분명,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곧바로 예의 그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며 냉소를 던졌다.

"그 목걸이가 어쨌다는 게냐. 그게 너희 남편의 유품이라도 된다던?"

"그렇습니다. 제 죽어버린 남편이 항상 목에 지니던 수호부, 미스토르테인입니다."

차가운 냉소에 답하며 트리스티아는 목걸이를 쥔 손에 자신의 사이오닉 포스, 통칭 아스가르드 말로 마력이라고 간단히 부르는 것을 목걸이에 주입하기 시작했고, 마력을 받은 목걸이는 이내 시퍼렇게 빛을 내며 목걸이의 형태에서 빛덩어리의 형태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본 담임의 표정은 새파랗게 굳어 있었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바람이와 지혁이는 당황한 얼굴표정을 한 채로 트리스티아와 담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시간동안 빛덩이는 잠시 트리스티아 손 위에서 빙글빙글 춤추더니, 이내 트리스티아의 손을 떠나 식탁에 엎어져있는 강철의 등 위에서 머물며 맴돌기 시작했고, 떨어진 눈송이가 조용히 녹아내리듯 내려앉아 몸 숙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강철의 몸이 허공으로 치켜올려지며 강렬한 빛덩이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실루엣 상으로의 윤곽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빛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만둬라! 또 그 아이를 두번 죽일 셈이냐!"

담임이 화가 난 나머지 트리스티아에게 돌진하려 하자, 아이리스가 허공에 선을 그으며 조용히 주문을 영창했고, 시동어가 맞어지는 시점에서 담임의 몸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 아이리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

보이지 않는 막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 담임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그 시간에도 트리스티아는 강철을 삼킨 빛덩이를 향해 양 손을 휘저으며 예의 그 슬픈 목소리의 영창을 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막에 묻힌 잔해여,-

-가식된 껍데기 안에 깃들어 있는 가련한 영혼이여,-

-허무의 날개를 열어 그대의 본모습을 드러낼지어다.-

한참의 긴 영창이 끝난 뒤에, 트리스티아는 마지막 시동어를 조용히 읇조렸고, 그와 함께 강철을 휩싸고 있는 빛덩어리와 담임을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막도 깨져 버렸다.

"폴리모르핑 디스펠[Polymorphing Dispell:변형막 해제], 액티브 메모라이즈."

-화아아아악!!-

-와장창!-

빛덩어리가 흩어지면서 주위는 섬광폭음탄이 터진 것처럼 환하게 빛났고, 너무나도 밝은 섬광에 세 왕녀들을 비롯한 전원이 고개를 치켜들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주문을 실행한 트리스티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섬광처럼 밝은 빛이 걷히기 시작했고, 주위의 사물이 그들의 눈에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들과 담임 일행의 앞에는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나 있었다.

"............젠장."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돼! 어떻게 저녀석이!"

그들의 앞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 한 남자가 희미한 빛에 싸여 허공에 떠 있었다.
시리도록 차가울 것 같은 은발, 그리고 핏기가 없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색.
여자의 몸처럼 가녀린 허리와 팔다리. 그리고 좁은 어깨와 밋밋한 가슴.
하지만 가장 그들을 당혹스럽게 했던 건 길어진 귀와 양쪽 뺨과 이마에 나 있는 코발트블루 빛 사이킥 코어였다.
그 남자의 얼굴에서 그가 강철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단서는 유사한 얼굴모양 하나였을 뿐이었다.

[To the next Phase]
by 카카롯매니악스 | 2006/02/10 10:12 | 그냥 자작소설.(볼건없수다)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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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BlackBell at 2006/02/15 19:12
미스토르테인... 미스토르테인... 미스토레인... 미스토레인... 미스틸레인...[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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